올터의 『성경 내러티브의 예술』(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1981)은 히브리 내러티브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저술이 되었다. 히브리어 성경에 정통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문학이론의 전문가인 올터는 성경의 탁월한 예술성을 그의 글을 통하여 입증하였다. 그는 “[성경] 본문이 복잡한 예술적 총체로 얼마나 탁월하게 엮어져 있는가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보았다”고 했다.
올터는 자신의 연구가 나오기까지 몇몇 선구적인 연구들을 들고 있다. 에드윈 굿(Edwin M. Good)의 『구약성경의 아이러니』(Irony in the Old Testament; 1965)는 1970년대 중반까지 문학적 관점을 접목한 단행본 수준으로 나온 유일한 책이었다. 그러나 올터는 굿의 책이 명시적인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성경문학의 독특성을 분별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스위스-독일계의 ‘작품해석’(Werkinterpretation) 문학비평 학파의 영향을 받은 화란 학자 포껄만(J. P. Fokkelman)은 『창세기의 내러티브 예술』(Narrative Art in Genesis; 1975)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이는 히브리 산문의 형식적 패튼 분석에 탁월함을 보인다.
이스라엘 성서학자인 시몬 바-에프랏(Shimon Bar-Efrat)은 히브리어로 『성경 이야기의 예술』(The Art of the Biblical Story; 1979)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독특한 히브리 내러티브 시학”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수준의 개론서라고 올터는 평가하고 있다.
페리와 스테른버그(Menakhem Perry and Meir Sternberg)라는 이스라엘 학자들은 공동으로 히브리어 계간지인 「하-시프룻」(Ha-Sifrut)에 성경 내러티브의 시학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를 도모하는 네 편의 소고들을 출판했다. 이들의 글은 후일 내러티브 연구의 기초가 되는 틈새, 인물묘사, 반복법과 같은 중요한 수사적 특성들을 밝혔다고 올터는 평가한다. 올터 자신은 페리와 스테른버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의 방법론에 대해 다소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은 성경의 문학성이 이의 여러 가지 목적 중에 하나로 보는데 반하여 올터는 ‘성경의 문학성’이 ‘신학적, 도덕적, 역사철학적 비전’과 완전히 섞여있는 형태로 본다. 즉 “성경의 신학적, 도덕적, 역사철학적 비전에 대한 완전한 인식은 성경의 문학성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달렸다”고 본다. 이런 관점을 갖게 된 것은 조엘 로젠버그(Joel Rosenberg)의 글에 기인한 것임을 그는 인정하고 있다. 로젠버그는 “종교적 문헌으로서 성경의 가치는 이의 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밀접히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라고 했다.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히브리 내러티브 연구는 20세기 후반의 수사비평과 문학비평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초기에 히브리 내러티브의 문학적 연구는 서사비평(Narrative Criticism)이라는 자의식을 갖기 전이기 때문에 상당부분 수사비평과 문학비평과 방법론상의 모호함과 중첩을 피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올터의 분석방법들은 마일렌버그(James Muilenburg)의 수사비평 방법론과 성경을 면밀하게 읽는다는 관점에서 중첩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올터가 역사비평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갖기 이전에 이미 양식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마일렌버그는 성경문헌학회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회장 연설에서 “양식비평과 그 넘어”(“Form Criticism and Beyond”; 1969)라는 선구적인 글을 발표하였다. 올터는 성경의 내러티브가 청중의 설득이라는 의도를 갖고 창의적으로 쓴 글임을 인정하고 있고 내러티브는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설계된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수사비평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일렌버거나 수사비평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이 아쉬운 점임을 하벨은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포껄만은 올터가 바이스(Meir Weiss)와 쇠켈(Luis Alonso Schökel)의 독창적인 글들을 인용하지 않은 것을 아쉬운 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제 올터가 성경의 내러티브 분석을 위해 사용한 문학적 기법들을 살펴보자. 그가 첫 번째 발견한 내러티브 문학기법은 “전형적 장면”(type-scene)이다. 전형적 장면은 “같은 이야기를 두세 번 혹은 그 이상 다른 인물에 대해서 혹은 때로 다른 상황에서 같은 인물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족장들이 세 번 기근 때문에 남쪽 지역에 내려가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창 12:10-20; 창20; 창 26:1-12), “하갈이 두 번 사라를 피하여 광야에 도피하여 기적적으로 우물을 발견한 것”(창 16; 창 21:9-21), “불임의 아내에게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 등이 전형적 장면의 실례들이다. 전형적 장면들에 나오는 이전 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긴장을 유발하게 되고, 동시에 비슷한 이야기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적 목적에 대한 지속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두 번째 올터가 발견한 성경의 문학적 특성은 “내레이션”(narration)보다 “대화”(dialogue)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대화에 비하면 내레이션은 부차적인 역할을 한다. 성경의 내러티브에 대화가 일차적인 소통의 수단이기 때문에 삼인칭 내레이션은 대화에서 말한 내용을 보조하는 위치로 종종 전락해버린다. 대화 기법은 아주 미묘하게 사용되어 ‘성격, 표현되지 않은 생각, 감정’ 등을 드러내는데 사용된다. 올터가 대화를 다룬 것이 그의 책 중에 가장 고무적인 부분이라고 와이브레이는 평가하고 있다.
세 번째 올터가 분석한 기법은 “반복의 기법”(Techniques of Repetition)이다. 올터는 에피소드의 반복은 구전이나 편집자가 맹목적으로 복사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성경 기자가 의도적으로 ‘몽타즈’(montage)를 구성하기 위한 기법이라고 본다. 반복 기법을 통해 저자는“효과적으로 대조시키거나 어떤 점을 강조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내러티브의 저자는 “반복 패튼에 나타나는 아주 작은 전략적 변화를 통하여 주석, 분석, 예견, 주제의 강조와 함께 미묘한 축소나 극적인 힘을 놀랍게 결합시킬 수 있다”고 올터는 주장한다. 성경의 산문체에는 특히 “핵심단어”(Leitwort)의 반복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어떤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핵심단어를 반복하는 수사법을 독일어로 Leitwortstil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주도적인 어휘 문체”(leading-word style)라는 의미이다. 내러티브에 사용된 핵심어 반복은 주제를 발전시키고 외관상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반복에 나타나는 큰 변화들은 “앞서 나타난 행동이나 태도의 강조, 극적인 발전, 가속화”를 의미하기도 하고 인물이나 플롯에 대한 기대치 않은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네 번째 “인물묘사와 과묵의 예술”(Characterization and Art of Reticence)이다. 성경에서 인물의 “동기나 태도나 도덕성”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인물 묘사는 주로 “행동, 몸짓, 외관, 다른 인물의 평가나 직접적인 대화” 등을 통해서 나타내고 해설자가 직접적으로 인물을 묘사하지 않는다. 내러티브에서 말하는 것만큼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인물 묘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경의 인물들이 “의도적인 방식으로 선별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라고 올터는 평가한다.
다섯 째 올터는 “합성 예술”(Composite Artistry)을 히브리 내러티브의 특징으로 보고 있다. 성경에는 전형적 장면이나 말 그대로의 반복과 같은 문학적 관례를 다수 따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전체 혹은 개별 책들 속에 “구분된 내러티브 조각들”이 존재하고 있어 성경의 문학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올터는 이런 합성된 자료들이 사용된 것은 “독특한 성경적인 비전의 포괄성”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두 가지의 다른 창조의 이야기는 중첩되었다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점에서 올터는 보고 각각의 창조 이야기는 세상의 창조에 대한 ‘다른 종류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올터는 “내레이션과 지식”(Narration and Knowledge)에 대해서 논하면서 성경의 해설자는 ‘전지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꽤 문자적으로 알고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평가나 의도나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도 알 정도로 전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전지적 해설자는 하나님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올터는 요셉 이야기를 형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앎과 모름이라는 관점에서 잘 분석하고 있다.
올터의 탁월한 문학적 분석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올터의 픽션(fiction)과 역사편찬(historiography)에 대한 관점은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상당한 의문을 던져놓았다. 그는 성경 내러티브의 상당 부분을 “역사화된 픽션”(historicized fiction) 혹은 “허구화된 역사”(fictionalized history)로 분류하고 있다. 올터의 성경역사 인식의 문제점을 하벨은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만약 허구적 상상력이 해방된 이스라엘 예술가의 특색라면, 성경 내러티브의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이스라엘 역사의 전통을 떠날 수 있는 잠재성이 항상 존재한다. 허구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말은 [성경의]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정말 역사적이라기보다는 허구적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욥의 이야기와 다윗의 이야기 사이의 차이점은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정도의 문제가 될 것이다. 욥처럼, 족장들이나 이스라엘 왕들의 내러티브들은 청중들과 공유된 종교적 비전에 의해 결정된 문학적 상상의 묘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내러티브들은 실제 일어난 것이나 전에 믿었던 것에 대한 일차적인 자료가 아니라 후대의 문학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전통의 예술적 묘사에 불과한 것이다.
트렘퍼 롱맨 (Tremper Longman III) 교수도 올터의 바로 이 관점이 가장 큰 우려할 점이라고 밝힌다. 롱맨은 “구약성경 연구의 문학적 접근: 약속과 함정들”이라는 소고에서 5가지의 문학적 접근의 함정들을 밝히고 있는데, 이 방법론이 “문학의 지시적 기능”을 부정하거나 상당히 제한하는 것이 가장 우려가 된다고 밝힌다. 이런 관점은 성경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접근을 통째로 혹은 상당히 부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실례로 벌린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무엇보다 내러티브는 표현의 한 형태임을 꼭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그림속의 사과가 진짜 과일이 아니듯이 실제적인 사람이 아니다”라고 벌린은 주장한다. 같은 문학적 접근을 취하는 올터의 견해도 벌린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올터의 탁월한 문학적 분석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신학적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김진규, <구약성경에서 배우는 설교 수사법>에서 인용; 각주 정보는 저서 참조 요망)
각종 내용들이 알차서 보니 신학대학교 교수님이셨군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마침 저서도 저에게 필요한 것 같아서 구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