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해석학에서 죽여놓은 저자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현대 성경해석학의 심각한 문제점은 저자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앤터니 티슬턴의 『두 지평』은 저자가 사라진 시대의 대표적인 성경해석학 저술이다. 티슬턴이 말하는 두 지평이란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을 가리킨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이 두 지평이 융합될 때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저술의 골자이다. 저자는 해석의 지평에서 사라졌다.[i]


현대 해석학에 있어서 저자가 사라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역사비평학은 최종적 형태의 성경을 신뢰하지 않고 성경의 원래 자료나 원래 구전 형태의 양식이나 성경의 편집자의 신학에서 저의 의도를 찾으려고 하니 저자를 상실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20세기 후반 성서학자들 스스로가 역사비평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지금 대세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공시적 접근(synchronic approach)을 취한다.


둘째, 성경해석에 세속 문학이론이 들어오면서 저자를 상실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신비평(New Criticism)은 저자를 배제하고 텍스트만 보려고 한다. 신비평은 텍스트 외의 저자의 심리나 외적인 증거를 텍스트에 갖고 오길 거부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텍스트에서 저자의 의도를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셋째, 해체주의(deconstruction)도 저자를 해석에서 몰아내버린 철학사상이다. 해체주의는 텍스트의 의미가 독자와 텍스트의 상호작용에서 발견된다고 보기 때문에 저자나 저자의 의도를 해석에서 배제시킨다.[ii] 해체주의적 접근은 텍스트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찾아내길 도모하기 때문에 텍스트의 유의미성 자체를 부정한다. 이는 성경해석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학계에서는 저자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오고 있다. 저자의 의도 발견을 일차적인 해석의 목표로 삼고 있는 대표적인 저술은 허쉬(E. D. Hirsch)의 『해석에 있어서 정당성』(Validity in Interpretation)이다.[iii] 카이저(W. Kaiser)와 밴후저(K. J. Vanhoozer)는 허쉬의 이론을 받아들여 저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대표적인 복음주의 학자들이다.[iv]


저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텍스트나 독자의 역할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성경해석학은 저자, 텍스트, 독자의 중요성을 모두 인정하는 추세이다.[v] 그런데 텍스트 중심이나 독자 중심을 강조하는 해석학 방법에는 나름대로 심각한 결함을 내포하고 있음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vi] 저자 중심으로 성경해석을 하되, 텍스트와 독자의 역할을 어떤 관점에서 고려해야 하는가가 균형 잡힌 성경해석에 대단히 중요하다.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때에는 인간 저자의 역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궁극적 계시자이신 하나님 저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롱맨은 의사소통 행위의 관점에서 저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의사소통 행위는 화자/저자가 메시지를 청자/독자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의미란 저자[화자]의 의도”에 달려있고 해석의 목표는 저자의 목적을 찾아내는 것이다.[vii] 저자/화자를 뺀 의사소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 저자와 신적 저자의 관계는 어떤가? 하나님께서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이시기 때문에 성경의 최종적 의미는 그분의 의도에 달린 것이다.[viii]


그런데 인간 저자가 하나님의 의도를 처음부터 모두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ix] 인간 저자는 오직 당시의 시대적 상황 가운데 주어진 메시지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구약 성경에 계시된 유월절이나 제사제도의 궁극적인 의미는 당시에 이런 제도를 수여받은 모세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내용들이다. 계시가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들 제도의 모형론적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밴후저는 신적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정경(canon) 전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적 저자와 연관된 성경의 ‘충만한 의미’는 오직 전체 정경(구약과 신약을 모두 포함)의 수준에서만 나타나 보인다고 말한다.[x]


그런데 저자의 의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경의 저자는 오래 전에 모두 죽었다. 저자의 의도는 그가 보낸 메시지인 텍스트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실상 저자의 의도는 텍스트를 통해서 재구성된 것이다. 그래서 텍스트를 면밀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xi] 허쉬는 저자의 의도는 텍스트의 의도와 같다고까지 주장한다.[xii] 저자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텍스트를 면밀히 읽을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성경 기록에 영향을 준 의사소통의 관습과 전략을 잘 알 필요가 있다.[xiii]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면 텍스트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해야 한다. 독자는 또한 성경이 어떤 의사소통의 관습 속에서 기록되었는지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소에서 다양한 세독법을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성경을 자세히 읽음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흔히 성경해석학 책들이 빠뜨린 중요한 요소가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이다(딤후 3:16). 성경의 저자에게 영감을 주신 것은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성경 자체도 성령의 역사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전제하는 것은 성경의 이해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성경 텍스트 자체에 신적 저자의 의도가 내제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의 의도는 배제하고 텍스트 자체만 보자고 하는 그런 세속 문학이론은 설 자리가 없다. 최종 텍스트인 성경 자체에 신적 저자의 개입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우리의 이해가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고 내가 받은 영향 속에서 성경을 읽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xiv] 독자의 이런 상황을 주관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는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의 선(先)이해(pre-understanding)를 갖고 간다. 개신교인의 성경 이해가 다르고, 가톨릭 교인의 성경 이해가 다르고, 유대교인의 성경 이해가 다르다. 개신교인 중에도 장로 교인과 순복음 교인과 감리 교인과 침례 교인의 성경 이해가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신교인과 가톨릭교인의 신앙적 차이는 ‘행위’와 구원과의 관계의 문제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개신교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만 가톨릭은 선행도 구원받는데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개신교인은 선행은 구원받은 자에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본다. 개신교인이 성경을 읽을 때 갖는 선이해는 가톨릭 교인이 성경을 읽을 때 갖는 선이해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리 모두가 성경을 읽기 전에 갖고 있던 선이해를 떨쳐버릴 수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 내가 어떤 선이해를 갖고 성경을 읽고 있는지 의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경을 보면서 나의 선이해가 정말 맞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더 나은 성경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의 증언에 의하면 성경을 읽는 독자는 홀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성령님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는 성도를 가르치고 지도하시는 사역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도록 도우시는 그분의 가르치심을 부정할 수 없다. 아니, 제대로 된 성경 이해를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지혜만을 의지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는 말씀을 연구하기 전에 그분의 도우심을 반드시 간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신적 저자이신 하나님은 인간 저자를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여 메시지를 전달하셨고, 이는 성경을 읽는 독자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셨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저자, 텍스트(성경), 독자가 모두 중요하다. 그런데 성경을 주신 궁극적 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독자인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셨는가를 깨닫는 것이 성경 해석의 목표가 되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