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이 목적인 설교'와 '감동이 있는 설교'는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의 설교는 '감동이 목적인 설교'였는가, '감동이 있는 설교'였는가?

예수님이 감동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협잡꾼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중의 반응을 보면 예수님의 설교는 분명히 '감동이 충만한 설교'였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무리가 놀랐다는 반응은 분명히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일 것이다(마 7:28).

찰스 스펄전 목사의 설교는 '감동이 목적인 설교'였는가, '감동이 있는 설교'였는가?

그가 감동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분명히 사기꾼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감동이 있는 설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를 듣던 청중들은 설교를 듣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여기저기서 흐느꼈다고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는 '감동이 목적인 설교'였는가, '감동이 있는 설교'였는가?

그가 감동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결코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감동을 목적으로 삼는 자는 쇼맨쉽으로 청중을 휘어잡기를 원하는 비열한 정치꾼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는 분명히 감동이 있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를 통해 미국의 대각성운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사도 바울의 설교는 '감동이 목적인 설교'였는가, '감동이 있는 설교'였는가?

바울이 만약 '감동이 목적인 설교'를 하였다면 결코 “지혜의 아름다운 것”(고전 2:1)으로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설교는 '감동이 없는 설교'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그의 설교는 분명히 '감동이 있는 설교'였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사도 바울, 찰스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는 '감동이 있는 설교'가 되었겠는가?

무엇보다 감동을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심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의 감동 감화하심을 기도하고 있다.

그러면 성령님의 감동 감화만 있으면 설교는 항상 '감동이 충만한 설교'가 되겠는가?

이런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설교 준비할 필요도 없어진다.

이렇게만 믿고 있는 어떤 오순절파 목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설교 준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성령님께서 감동 주시는 대로 말씀을 전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설교에 과연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역사하시겠는가?

내가 답을 하지 않아도 답은 뻔한 것이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땀 흘리는 수고를 배제하고 오직 성령의 역사만 믿고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까? 이는 내가 답을 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설교자로서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가는 너무나 중요하다.

성령님은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신다.

기도하면서 준비하는 말씀 준비위에 성령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신다고 믿는다.

내가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성령님께서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나 찰스 스펄전이 감동과 생명력이 있는 설교를 하도록 어떤 언어를 사용하셨는가에 있다.

왜 예수님의 설교에는 그렇게 많은 그림언어와 대구법이 등장하고 있는가?

산상수훈 일부분만 보면 예수님의 설교에는 그림언어가 넘쳐난다. 형제를 비판하지 않도록 교훈하기 위해 눈 속의 '들보'와 '티'라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셨고(마 7:1-5), 진리를 아무에게나 던지지 않도록 '개', '진주', '돼지'라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셨다(마 7:6).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기 위해서 '아들', '떡', '돌', '생선', '뱀'이라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셨고(마 7:9-10),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설명하기 위해서 '좁은 문'과 '넓은 문'이라는 그림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셨다(마 7:13-14).

예수님의 대부분의 비유들은 모두 그림언어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의 설교에는 대구법이 넘쳐난다. 대구법으로 꽉 짜인 수많은 설교를 발견할 수 있다. 아래에 /와 //로 표시된 부분은 대구법으로 형성된 문장들이다. 산상수훈에는 이런 구조가 넘쳐난다.

(A)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 비판하지 말라 //

(B)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

(C)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D)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E)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

(F)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1-5).

지혜의 말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던 사도 바울의 설교는 어떨까?

바울의 설교에도 그림언어와 대구법이 차고 넘친다.

바울이 사용하는 그림언어들이 얼마나 종류가 많고 다양한가? 각자의 은사를 설명하기 위해 ‘지체’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사역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이유와 목표 의식과 정도(正道)를 가르치기 위해 ‘달리기’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을 설명하기 위해 ‘군사’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올바른 언어 사용을 위해 ‘소금의 맛’ 이미지를 사용하고, 영적인 무장을 위해 군인의 ‘전신갑주’ 이미지를 사용한다.

바울은 또한 대구법도 곧잘 사용한다. 바울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고전 2:4-5)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바로 이 본문에서조차 두 가지 대구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 (대조적 대구법)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대조적 대구법)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이런 풍성한 그림언어와 대구법의 유산이 어디서 온 것일까? 그 출처가 히브리 시인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이 분야는 나의 전공분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십 년간 연구해오고 있다. 히브리 시의 두드러진 3가지 특징은 ‘밀도 있는 그림언어’, ‘빈번한 대구법’, 그리고 ‘생략법’의 사용이다. 생략법은 설교라는 맥락에는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림언어와 대구법은 설교에 넘쳐난다.

정말 감동이 있는 설교에는 이 2가지 요소가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나 찰스 스펄전의 설교에는 특히 그림언어로 가득 차 있다.

에드워즈의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란 유명한 설교는 매우 그래픽한 그림언어로 넘쳐난다.

찰스 스펄전의 설교의 특징을 제이 아담스는 '감각적 호소'(sense appeal)라는 관점에서 분석했다. 감각적 호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한 호소를 의미한다. 이는 곧 청중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고, 들을 수 있게 하고, 냄새 맡을 수 있게 하고, 맛을 보게 하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언어를 사용한 것을 의미한다.

스펄전의 이런 언어가 바로 성경의 히브리 시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이 사용한 그림언어와 맥을 같이 한다.

요컨대, '감동을 목적으로 하는 설교'와 '감동이 있는 설교'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솔직히 말하지만 어떤 설교자가 '감동을 목적으로' 설교하겠는가? 협잡꾼이 아니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한다던 바울이 왜 그림언어와 대구법을 그렇게 밀도 있게 하용하고 있는가? 이는 히브리 시인이 가진 언어적 특성을 바울이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설교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전해야 하겠는가? 식어빠진 감자를 먹이듯이 전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히브리 시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동감과 생명력이 넘치는 그림언어와 감동이 넘치는 대구법으로 직조하여 전해야 하겠는가?

오래 전에 김지찬 교수는 히브리 시인의 중요한 수사법을 꿰뚫어보고 “설교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내가 지금 논하는 분야는 바로 설교 수사법의 영역이다. 바울이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전하지 않는다는 말의 맥락을 잘 알아야 그의 말을 오해하지 않는다. 주전 5세기경에 활동했던 궤변론자들의 이론이 바울이 활동하던 1세기에 ‘제2의 궤변론’으로 다시 등장한다. 궤변론은 진실의 유무를 떠나 궤변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수사 원리이다. 바울이 경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제2의 궤변론이다.

그러나 바울은 히브리 시인으로부터 전수받은 히브리 시의 수사법 사용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글에는 그림언어와 대구법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지만 어거스틴 이전에 수많은 교부들이 바울의 말 때문에 설교에 수사법을 사용하길 꺼렸다. 그러나 이 문제가 개종 전 수사학 교수였던 어거스틴의 글에 의해서 해결된다. 아래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보자.

“수사학의 기술을 통해 진리 또는 허위를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는 것이라면, 허위에 대항해 진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수사학의 기교로) 무장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을 누가 감히 하겠는가? 말을 바꾸어, 허위를 펴는 자들은 그럴싸한 허두(虛頭)를 꺼내 청중이 호감을 갖고 귀를 기울이고 순순히 따르게 만들어도 되지만 (진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것을 몰라도 된다는 말을 누가 하겠는가?

그자들은 허위를 간결하고 명료하고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 데 비해, 이 사람들은 진리를 말하면서도 듣기에 지루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끝에 가서는 믿기가 힘들어서야 되겠는가? 저 자들은 허위의 논리를 갖고서 진리를 공박하고 거짓을 주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진리도 옹호하지 못하고 허위도 배격할 능력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저 자들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오류로 유도하고 떠밀면서도 그 말주변으로 사람을 두려워 떨게 하고 울리고 웃기며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데, 이 사람들은 진리에 이바지하면서도 느리고 냉담하고 졸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할 만큼 어리석은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모름지기 언변의 능력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어서 그릇된 것을 설득시키든 옳은 것을 설득시키든 간에 매우 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악인들이 도착되고 허황한 사건을 승소시키기 위해 악의와 오류에다가 이용하고 있는 지경이라면, 왜 선을 위하여 진리에 이바지하는 데 사용할 수 없단 말인가?” (아우구스띠누스, 『그리스도교 교양』 [성염 역; 교부 문헌 총서 2; 왜관: 분도출판사, 1989], 300-301).

어거스틴 이후 설교에 수사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분위기로 바뀌게 된다. 오늘날 설교학에서는 고전수사학 이론을 비롯하여 다양한 수사법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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