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명한 큐티 강사는 “말씀을 연구하려 하지 말고 말씀이 임하게 하라.”라고 외친다. 그런데 그의 책에는 어디에도 성경해석의 과정을 소개하지 않는다.
어떤 큐티 책은 “오늘 본문을 통해 느끼는 것이 뭔가?”라는 질문을 하고 바로 적용으로 이끈다. 성경 본문을 이렇게 접근하면 10사람이면 10사람이 그 말씀을 다르게 이해할 소지가 있다.
이런 식의 큐티는 오늘날 소위 말씀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해석학(New Hermeneutic)의 방법론과 맥을 같이한다. 어떻게 보면 어떤 본문은 성경해석의 과정 없이도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십계명을 묵상한다면 우리에게 해석 없이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런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그대로 우리에게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메시지이다. 이는 해석의 과정이 없이도 그 의미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의 문자적인 메시지만 적용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는데 상당한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이는 단지 불법적인 sex만을 의미하는가? 적어도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의 문자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별로 적용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에서만 이해하면 정경적 맥락에서 평가할 때 본문의 메시지를 축소해서 이해하는 reductionism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은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음욕’까지도 간음으로 규정하고 있다(마 5:27-28).
이렇게 이해하면 모든 사람은 이 말씀에 적용할 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속의 음욕으로 고민하고 있는가?
우리는 제7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마음속까지 깨끗이 청소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런 해석의 과정을 거칠 때 본문의 메시지를 풍성하게 적용할 수 있다.
‘살인하지 말라’(출20:13)는 계명은 어떤가?
이 말씀을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는 정경적 맥락에서 보면 심각한 reductionism에 빠진다. 신약성경에는 이 의미를 확대 해석하고 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나 욕하는 것이나 분노하는 것이나 미련한 자라고 하는 것이나... 이런 모두를 살인의 범주 속에서 해석하고 있다(마 5:21-22; 요일 3:15).
이런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출20:13의 메시지를 오늘날 우리에게 풍성하게 적용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을 죽이는 기독교인은 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움의 문제, 욕설, 폄하, 분노 등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해석의 과정이 크건 작건 간에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이를 바로 적용할 수 있다. 그가 성경 한 권을 갖고 묵상을 하든 주석을 옆에 두고 하든 간에 반드시 해석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해석의 과정이 없는 큐티는 축소주의, 문자주의, 율법주의 등 여러 가지 함정에 빠질 위험이 상존한다. 말씀의 해석 없이 ‘오늘 말씀에서 느낀 점이 뭔가?’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큐티는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매우 높다. 그래서 큐티도 성경해석의 원리에 따라 바로 가르치고 바로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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